기증 상자에 책을 넣으셨다가 몇 걸음 가서 되돌아오신 분이 있어요. 다시 꺼내 가방에 넣고 가셨습니다. 낡고 얇은 책이었어요.
저는 그 장면을 이해합니다. 저에게도 그런 책이 몇 권 있거든요.
다 읽었고 다시 볼 일도 없는데 못 놓는 책이 있죠. 그런 책은 대개 내용 때문에 남는 게 아니더군요. 그 책을 읽던 시기가 거기 묻어 있어서 남습니다.
책장은 그래서 서고이자 연표예요. 어떤 칸은 힘들었던 해이고, 어떤 칸은 뭔가를 결심했던 해입니다. 그걸 버린다는 건 그 시절을 처분하는 것처럼 느껴지죠.
그래서 정리하다가 손이 멈추는 자리는 대체로 정해져 있더군요. 내용이 좋았던 책이 아니라, 그 책을 들고 다니던 때가 선명한 책 앞에서 멈춥니다.
문제는 자리예요. 책장이 꽉 차면 새 책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. 그러면 바닥에 쌓이고, 쌓이면 안 보이고, 안 보이면 안 읽게 되더군요.
과거를 다 끌고 가면 현재가 들어올 틈이 사라집니다. 저는 이게 책장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.
서고에서도 같은 일을 합니다. 자리가 없으면 새 책을 못 들이니까, 해마다 덜 나가는 책을 골라 창고로 내리죠. 버리는 게 아니라 자리를 다시 정하는 일이더군요.
짐을 다 지고 오르는 자는, 정상까지 못 간다.
저는 이렇게 나눕니다. 다시 펼 것 같은가, 그리고 이 책이 지금의 나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는가. 둘 다 아니면 놓습니다.
대신 놓기 전에 한 가지를 해요. 그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 하나를 옮겨 적습니다. 그러면 물건은 가도 그 시절은 남더군요. 이 절차 하나로 훨씬 쉽게 놓게 됐습니다.
적어놓은 문장을 나중에 다시 보면 신기한 게 있어요. 그 책 전체보다 그 한 줄이 더 자주 쓰이더군요. 정작 필요했던 건 책장 한 칸이 아니라 그 한 줄이었던 겁니다.
책을 못 버리겠다면, 책장을 통째로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됩니다. 오늘 한 권만 골라 그 안의 한 문장을 적고 내려놓아 보세요.
과거를 지우는 게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겁니다. 무엇을 안고 갈지, 무엇을 문장으로만 남길지는 내가 정하는 거예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