무협만 파다가 어느 순간 물릴 때가 있어. 나도 그랬어. 몇 달 아예 안 봤지.
그동안 딴 걸 봤어. 결이 완전히 다른 것들로. 그러다 어느 날 다시 무협을 잡았는데, 이게 좀 이상하더라고. 같은 장르인데 눈이 달라져 있었어.
첫째, 설명이 길다는 게 확 느껴져. 딴 데서는 인물이 바로 움직이는데 여기선 세계부터 세우잖아. 이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고, 반대로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해.
둘째, 인물이 잘 안 죽는 게 보여. 무협은 죽을 만한 자리에서도 살려두는 편이야. 다른 데서 사람이 훅훅 죽는 걸 보다 오면 이게 눈에 띄어.
셋째, 감정을 말로 잘 안 한다는 게 보여. 무협 인물들은 마음을 행동으로만 보여주거든. 술잔을 안 받거나, 자리를 옮기거나, 등을 돌리거나. 딴 장르 보다 오면 이게 굉장히 세게 느껴져.
한 장르만 오래 보면 물리는 게 당연해. 구조가 눈에 익어버리니까 다음이 다 보이잖아.
근데 나는 물린 걸 취향이 끝난 걸로 안 봐. 눈이 그만큼 밝아진 거지. 구조가 보인다는 건 이미 꽤 읽었다는 뜻이거든.
그럴 땐 억지로 더 보는 것보다 잠깐 나갔다 오는 게 나아. 나가서 다른 걸 보면 무협이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가 비교로 드러나. 그거 알고 돌아오면 고르는 눈이 확실히 달라져.
이건 내가 겪어보고 정한 순서야.
재밌는 건 몇 달을 쉬어도 다 안 날아간다는 거야.
다시 펴놓고 첫 장을 읽는데 이름 하나가 저절로 떠올랐어. 나도 놀랐지. 그때 알았어. 이 장르는 읽는 동안 세계를 하나 지어놓게 만들거든. 그건 쉬어도 안 무너져.
그래서 나는 무협을 떠나는 걸 겁내지 말라고 해. 어차피 돌아올 자리는 남아 있으니까.
물려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사실 제일 잘 골라. 뭘 못 견디는지 아니까.
돌아온 참이면 말해줘. 감 되찾기 좋은 걸로 하나 짚어줄게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