메뉴판 앞에 한참 서 계시다가 결국 아메리카노를 시키신 분이 있었어요. 나라 이름이 적힌 칸을 손가락으로 세 번쯤 오르내리시더라고요.
물어봤더니 뭐가 뭔지 몰라서 아무거나 시킨다고 하셨어요. 그 말이 좀 아까웠거든요. 오늘은 그 칸 얘기를 해볼게요.
말 그대로예요. 여러 산지 원두를 섞어 놓은 게 블렌드고, 한 나라 한 농장 것만 담은 게 싱글 오리진이에요.
섞는 데는 이유가 있거든요. 원두는 농산물이라 해마다 맛이 달라져요. 한 가지만 쓰면 그 변덕이 잔에 그대로 나오는데, 몇 가지를 겹쳐두면 서로 메워주더라고요.
그래서 가게 대표 메뉴는 대개 블렌드예요. 언제 오셔도 비슷한 맛이 나야 하니까요.
한 군데 것만 담으면 그 산지의 버릇이 안 가려집니다. 신맛이 도드라지는 데는 도드라지는 대로, 묵직한 데는 묵직한 대로 나와요.
그래서 재미도 있고 위험도 있거든요. 취향에 맞으면 그날 하루가 좋고, 안 맞으면 반쯤 남기고 가시더라고요.
저희 가게에서는 이렇게 갈라서 말씀드려요.
우유가 들어가면 섬세한 향은 거의 덮이거든요. 비싼 싱글 오리진을 라떼로 드시면 아깝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그래서예요.
이 오해를 자주 만나요. 섞은 거니까 남는 걸 모아놨겠거니 하시는 거죠.
만들어 보면 반대예요. 어떤 걸 얼마나 겹쳐야 이 맛이 나는지 맞추는 일이 오히려 손이 많이 갑니다. 한 가지가 떨어지면 비슷한 성격의 다른 걸로 갈아 끼워야 하고, 그때마다 다시 맞춰보거든요.
싱글 오리진은 좋은 걸 잘 고르는 일이고, 블렌드는 맞추는 일이에요. 결이 다른 작업이지 급이 다른 게 아니에요.
나라 이름 하나만 적혀 있으면 싱글 오리진이라고 보시면 대개 맞아요. 이름이 붙어 있거나 하우스라는 말이 들어가 있으면 블렌드고요.
그 옆에 두어 단어가 더 적혀 있을 거예요. 그게 그 잔에서 뭐가 제일 먼저 오는지를 적어둔 거거든요. 저는 손님께 그 단어만 보시라고 말씀드려요. 나머지는 사실 저희끼리 쓰는 말이에요.
카운터에서 제일 자주 듣는 말이 오늘 뭐가 괜찮냐는 말이에요. 저는 그 질문이 제일 반갑거든요.
그날 상태가 제일 좋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어차피 내리는 사람이니까요. 손님이 미리 공부하고 오셔야 할 이유는 없어요.
밤에 오시는 분들은 대개 하루를 다 쓰고 오세요. 그런 날에 메뉴판 앞에서까지 고민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. 그냥 진한 게 좋은지, 부드러운 게 좋은지만 말씀해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맞춰드릴게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