하루를 앓아 누웠다는 이야기를 하시는데, 정작 아팠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하셨습니다. 이야기의 전부가 아무도 안 물어봤다는 것이었습니다.
그러면 그 마음의 이름은 슬픔이 아닙니다. 서러움입니다.
슬픔은 한 겹입니다. 잃은 것을 향합니다. 사라진 것, 끝난 것, 없어진 것. 대상이 분명하고 방향이 하나입니다.
서러움은 두 겹입니다. 아래에 슬픔이 있고, 그 위에 대접받지 못했다는 판단이 얹혀 있습니다. 잃은 것도 있는데 그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것까지 들어 있습니다.
그래서 서러움은 늘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. 슬픔에는 사람이 없어도 되는데, 서러움에는 안 물어봐준 누군가가 반드시 있습니다.
슬픔은 그 자리에서 옵니다. 잃은 순간에 옵니다.
서러움은 늦게 옵니다. 대개 며칠 뒤, 설거지를 하다가, 버스에서 갑자기 옵니다. 이상하게 여기실 일이 아닙니다. 두 번째 겹은 시간이 지나야 쌓이기 때문입니다. 그 자리에서는 그냥 힘들었고, 며칠이 지나 아무도 안 물어봤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나서야 위층이 올라옵니다.
늦게 온다고 해서 가짜인 것도, 유난인 것도 아니지요.
지금 그 마음을 두고 이렇게 물어보시면 됩니다. 그 일을 누군가 알아주었다면 지금과 달랐겠습니까?
두 번째로 답하시는 분이 많습니다. 그리고 그 답이 나오면 다뤄야 할 대상이 바뀝니다. 잃은 것이 아니라 안 알아준 자리가 문제라는 뜻이니까요.
서러움을 슬픔으로 부르면 엉뚱한 것을 붙잡게 됩니다. 잃은 것만 계속 들여다봅니다. 그런데 무거운 건 잃은 것이 아니라 혼자 겪었다는 쪽이라, 아무리 들여다봐도 안 줄어듭니다.
반대로 서러움이라고 정확히 적으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. 말할 대상이 생깁니다. 슬픔은 말한다고 줄지 않지만, 서러움은 한 사람에게만 도착해도 위층이 내려앉습니다.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으면 되는 구조라서 그렇습니다.
슬픔 쪽이면 할 일이 없습니다. 시간이 처리합니다.
서러움 쪽이면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. 한 사람에게 사실만 말하는 것입니다. 위로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. "그날 나 혼자 하루 종일 누워 있었어." 이 한 문장이면 됩니다.
여기서 자주 걸리는 자리가 있습니다. 말하면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안 하시는 겁니다. 그런데 안 말하면 위층은 안 내려갑니다. 유난이라는 판정을 내리는 사람은 대개 안 물어본 그 사람인데, 그 판정을 내가 대신 내려주고 있는 셈이지요.
잠을 못 주무시거나,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,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.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.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.
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.
며칠 지나 갑자기 무거워진 일이 있으시다면 하나만 물어보시죠. 누가 알아줬다면 달랐겠습니까.
이름을 붙이면 크기를 잴 수 있게 됩니다.